나는 가끔 내가
특수교사라는 것이… 싫다.
글. 김미경 호수초등학교 교사
1991년 5월
교실 창밖으로 교외선 열차가 지나가는 5월, 선희는 시냇가에서 가재를 잡아왔다. 나와 효정이,
선희, 그리고 아빠와 둘이 사는 동식이, 영화, 우리는 신이 나서 가재 두 마리를 함께 키웠다. 그러
던 어느 날 어항에 가재가 한 마리 밖에 없었다. 다른 한 마리는 머리와 몸통만 있고 다리 부분은
잘려나가고 없었다. 아이들은 모두 비명을 질렀다. 정적이 잠시 흘렀다.
돗수높은 안경너머로 눈동자를 떨며 효정이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선희는 외로웠었나 보다고
했다. 성적이 자꾸만 떨어져서 도움반으로 오기 시작한 선희는 아주 쾌활하고 명랑한 친구였는데
2학년이 되면서 체육시간 운동장 끝에서 혼자 아이들의 무리에 들어갈까 말까 망설이기 시작하고
있었다. 어쩜 그 마음이 외로워서 친구를 잡아 먹었다고 했을까. 아직 어린 아이입에서 외롭다라는
말을 듣는 순간 마음이 짠하였다. 결국 우리는 선희의 말대로 가재를 시냇가로 보내주었다.
수학 숙제를 주었다. 일요일 숙제였다. 당연히 학생은 숙제를 해와야 하는 거라고 생각했던 초임
교사는 숙제 해오지 않은 아이들에게 맥주를 주겠다고 말했다. 맥주는 엄지와 검지 두 손가락으로
코를 잡아당기면 코끝이 술 마신 것처럼 빨개져서 맥주라고 하는 벌이었다. 요즘 교육현장에선 생
각할 수 없는 체벌(?)이다. 맥주를 주겠다고 했더니 평소에 책을 좋아하고 노래를 잘 흥얼대는 효
정이가 의자를 뒤로 젖히며 말했다.
"선생님 맥주 말고 쏘주로 주세요"
그녀석의 당돌한 말이 너무 웃기고 신통해서"오늘은 술 안팔겠다"고 마무리를 했다. 배추 인형
처럼 생겼던 도수높은 안경을 썼던 아이, 효정인 초등학교 6학년을 졸업하고 일반중학교 진학을
했다가 중간에 특수학교로 전학을 갔다고 했다. 우연히 길에서 만난 어머님 말씀이 안타까웠
다. 소설가가 되고도 남을 녀석이라는 생각이 들었던 친구였는데 약시아동임에도 일반학교에
서 학생으로서 적응하기가 어려웠었던 모양이다. 90년대 초 지금처럼 특수교육에 대한 지
원도 많지 않았고 어쩌면 아이에게 안전한 곳이라 여긴 부모님의 선택이었을 것이다.
동수는 보육원이 집인 아이였다. 일곱 살때 몸에 담뱃불에 데인 흉터가 많은 모습으
로 기차에서 발견되어 보육원에 맡겨졌다. 1학년때는 자기 주변에 사람들이 접근하는 것조차 싫어하며 비명을 질러대던 아이였다고 한다.
전체적으로 적응과 학습에 어려움을 보였고 내가 발
령을 받아 갔을 때는 3학년이었다. 정리정돈을 잘하
고 불의를 보면 못 참고 학교에서 어린이날 기념으로
보육원 아이들과 생활환경이 어려운 아이들에게 짜
장면을 사주었을 때 끝까지 안 먹겠다고 우겨 결국
안 먹었다. 자기를 사랑한다는 느낌을 받으면 무조건
따르던 그런 학생이었다. 몇 년 후 다른 학교로 이동
을 하고 출장을 나갔다가 의정부 터미널에서 중학교
교복을 입은 채 낯설고 두려움에 떨던 처음 그 모습
으로 배회하고 있는 것을 보았다. 평일 학교에 있을
오후 시간이었다. 내가 탄 버스 창밖으로 그렇게 지
나가버린 동수는 아직도 내 마음에 못이 되었다. 혼
자서는 할 수 없는 일, 우리가 함께 해주어야 하는
일, 스스로 일어설 수 없을 때 서로 어깨가 되어주어
야 하는 일, 그 길이 멀게 느껴져 봄 날 햇살이 참으
로 무심하던 순간이었다.
2009년 5월
우정반에서 민욱이는 말하기 듣기 수업과 수학 곱셈수업을 했다.
쉬는 시간 중에 문장제 수학책을 가지고 와서 자기가 일부러 틀리게
만든 식을 선생님께 보이며 틀리게 읽어보며 선생님의 반응을 본다.
45+36을
"45빼기 36이야"/" 45더하기 36이야 아니야"/" 아니야 빼기야"
오늘따라 그런 말들의 반복을 쉬는 중간 중간 마다 와서 반복한다.
문장제 책을 보는 앞에서 치우고 시작종이 치자 수업을 시작했다. 이
미 민욱이가 끝낸 곱셈식과 곱셈 빈 칸 완성하기가 나왔다. 8단 8×8
은 64 아니야? 7×7은 78아니야?, 8×8은 176을 반복하며 웃는다.
결국 반복행동이 지나치게 많아져 하지 못하도록 했다. 내일 다섯번
까지만 하면 수학책을 돌려주기로 하고 수학 익힘 과제를 마무리하고
책을 내가 가지기로 했다. 갑자기 울먹이며 책을 가지고 가겠다고 우
기기 시작했다. 뜻대로 되지 않자 다른 교과서에 낙서를 하겠다고 말
했다. 나는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그러면 나쁜 아이야? 그래서 싫어요? "
"아니야 민욱이가 하고 싶으면 공책에 낙서처럼 해도 되. 자 이렇게
적는 거야"
"아니야, 책에다 할거야"
통합반에 가면 친구들 책이나 선생님 책의 같은 쪽을 찾아 뺄셈 된
곳을 다 덧셈으로 바꿀 것이다. 아이가 진정되길 기다렸다가 약속을
지키면 내일 주기로 했다.
"자, 참아보자, 가슴에 손 모으고 한번, 한숨 크게 숨 한번 쉬고, 참자"
"잘 참자"
아이와 함께 통합반 교실로 올라가 선생님께 우정반에서 있었던 일
을 말씀드리고 3교시에 혹시 나타낼 학생의 행동을 예상하시라고 말
씀드렸다. 아이의 입장을 선생님 나름대로 이해하시고 반응해주시기
를 기대해 보았다. 교사가 이렇게 인지적 방법을 동원해 하는 것이
바람직할까. 그리고 민욱이 자신에게는 알아듣기 힘든 이해할 수 없는
수업 내용을 해석하고 견디는 자기 스스로 선택한 즐거움이 아닐까
생각하며 계단을 내려왔다.
혼자서는 할 수 없는 일,
우리가 함께 해주어야 하는 일,
스스로 일어설 수 없을 때
서로 어깨가 되어주어야 하는 일,
그 길이 멀게 느껴져 봄 날 햇살이
참으로 무심하던 순간이었다.
2012년 2월
2월 봄방학이 며칠 남았다. 정신없는 하루다. 한 친구는 아스퍼거
자폐성향에 과잉행동이 있는데 그 날 따라 통합학급에서 자기 기분이
나쁘다고 화를 내며 아이들을 위협해서 우정반으로 내려왔다. 우정반
에 와서 선생님을 폭파시켜버리면 어떻게 되냐고 내게 물었다. 나를
폭파시켜버리고 싶을 정도로 기분 나쁜 일이 있었냐고 했더니 그렇다
고 말한다. 나를 지금 폭파시켜버리면 다음에 기분 나쁠 땐 어떻게 할
거야 했더니 그래도 폭파시켜버리겠다고 한다. 그래 정말 기분이 나
쁘구나 해주었다. 씩씩대며 옆에서 서성대다 책상을 발로 찬다. 지적
장애를 가진 다른 한 여자아이도 그 시간에 울고 있었다. 한가지 기
분 나쁜 일이 생기면, 모든 나쁘거나 슬픈 일을 그 일로 대치하여 말
하는 아이다. 친구가 안 놀아줘도 이가 빠져서 슬퍼요. 공부하기 싫거
나 기분이 우울해도 이가 빠져서 슬퍼요라고 말하는 아이다. 그 아이
가 화장실을 다녀온 후로 늑대 모자 달라며 소리 지르며 울고 있다.
통합반 체육시간에 아이들은 피구 하는데 참여하지 않고 그 모자만
쓰고 혼자 놀이하며 중얼거리고 있는 것을 보았다. 몇 번 통합학급
선생님이 달래며 참여 시키려 하는데 참여 하지 않으려는 것을 멀리
서 봤었다. 공부가 끝나고 우정반에 온 아이의 모자를 뺏어버렸다.
그 아이는 내게 소중한 모자를 뺏긴 것이다.
신학기가 시작되고 통합학급 적응기간이다. 5학년 특수교육대상학
생들 중에서 통합반 부적응이 힘든 경우는 적응기간 동안 우정반에
오도록 한다. 1학년 신입생의 경우는 내가 먼저 그 학급에 지원을 함
께 들어가 4주후에 우정반에 올 수 있도록 한다. 민욱이가 1학년 때
3월 한달을 1학년 교실에서 보내다가 적응기간이 끝나고 우정반으로
불렀을 때 내가 여기 왜 왔지 하던 표정인 것 같았던 아이의 모습은
이게 아니구나 싶었다. 교사인 나는 특수학급 운영에 따랐을 뿐 학생
인 그 아이의 의사를 반영하지 않았다. 자폐성을 보이는 그 친구에게
이제부턴 나와도 공부하는 거라고 말하는 건 뜻 밖의 상황이 아니었
을까?
오늘은 어제까지 통합반 짝이 맘에 안 들어 짝을 바꿔줘야 한다고
말씀하시던 엄마가 고맙고 미안하다며 하교 길에 인사를 하고 가신다.
신학기 시작한지 2주가 되어간다. 첫 한주는 아이도 적응하기 힘들어
하는 것 같아 지켜보자고 말했다. 두 번째 주가 시작되며 아이가 씩
씩하게 잘 다녀서 짝꿍 안바꿔도 될 것 같다고 말씀을 드렸지만 어머
님 마음이 불편하다고 바꿔 달라하신다.
통합학급 선생님은 그대로 하루만 더 있다 다음 주에 바꾸겠다 하셨
지만 어머님은 결국 바꿔달라고 나에게 말씀하시어 통합학급 선생님
께 다시 말씀드려 바꾸었다.
여기, 지금
1990년 초임지. 도봉산 오봉이 보이는 교실은 아름
다웠다. 지금은 변해버린 북산산성 가는 길을 따라 삼
상리 송추 길을 아침 일찍 출근하는 버스 창밖으로 논
밭 위로 여린 아침 안개가 머물고 마음도 몸도 맑아지
고 착해 질것 같은 그런 시간들이었다. 어설픈 교사에
비해 넘치던 아이들의 에너지에 감사했다. 그 학교에
있었던 3년 동안 세 번 교실이사를 했었다. 가장 마지
막 이사는 2층 교장실 바로 윗 교실 교장선생님보다
더 높은 3층 교실이었다.
그 후로도 2000년까지 열한번의 교실 이사를 했
었다. 지금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지금은 2012년
내가 근무하는 학교, 완전통합학급 학생까지 총 11명
이다. 1학년 신입생이 3명, 여러 통합학급 담임들과
메신저를 주고 받고 통합학급을 순회하고 지원을 들어
가고 각 각의 어머님들에게 하루의 일들을 말해주고,
각 반 장애이해 수업을 들어간다. 그렇게 하루가 지나
고 퇴근을 할 때 쯤 숨이 차다. 그래서 걸어서 퇴근한
다. 또 아침 출근길을 아직 겨울나무와 봄나무가 지키
는 공원길로 30분을 걸어서 출근한다. 오리가 아닌
우아한 백조이고 싶어서 걷는다.
내 나이 20대 발령장을 들고 찾아가던 9월, 북한산
성 길옆에 피었던 코스모스 같았던 시절, 코스모스 같
았던 아이들이 보고 싶다. 그리고 이제 50대가 되려
한다. 이제는 특별하게 보이지 않는 그냥 나의 고객,
아이들이 있을 뿐이다. 그런데 사랑하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