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 따라 강 따라, 춘천여행
글·사진 전윤선 장애인 여행작가
여행의 풍경은 TV나 책, 인터넷, 사회관계망을 통해서 익숙하지만
그 안에 이야기는 낯설겁니다. 장애인들이 여행하기 시작한 지 얼마되지 않았다는 증거죠.
여행지의 주민도 장애인은 낯선 여행자일 것이고, 여행자 객체인 장애인도
기존의 여행이야기와는 사뭇 다른 이야기를 만들어 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익숙한 풍경, 낯선 이야기"가 펼쳐질겁니다.
초록이 짙어 봄과 여름 사이를 오가는 계절이다. 두 계절을 동시에 느낄 수 있는 어느 날, 강 따라 물
따라 춘천으로 달려갔다. 경춘 전철과 ITX 청춘열차가 운행하면서 춘천여행이 한결 가벼워졌고 춘천
역에서 소양호까지도 저상버스가 수시로 운행되어 관광약자도 이동이 한결 부드러워졌다.
춘천하면 소양호수와 댐을 빼놓을 수 없다. 소양 댐은 1960년대 근대화와 산업화를 위해 사회 기반
시설을 필요로 하는 사회적 여건으로 댐 건설이 시작됐다. 댐이 만들어지면서 인근에 수많은 마을이 물
속에 잠겼고 일대는 호수가 생겨났다. 구불구불, 구불 길을 따라 댐 정상에 올라서니 바다 같은 소양호
가 잔잔하게 버티고 있다. 댐에 담긴 물의 양이 워낙 많고 웅장해서 왠지 위압감이 든다. 그리고 "소양
강 처녀" 노래가 옹알이처럼 입 밖으로 새어 나온다. "해~저문 소~양강에 황혼이 지면 외로운 갈대밭
에 슬피우는 두견새야". 국민가요처럼 불리는 소양강 처녀 동상도 댐 정상에서 지그시 소양호를 내려
다본다. 그녀는 물 속에 잠긴 마을을 응시하며 그리운 사람을 한 없이 기다리는 것 같다. 세월이 흘러
소양강 처녀는 나이가 들었겠지만 그녀를 상징하는 동상은 열여덟 딸기 같은 순정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듯 하다. 저 많은 물을 어떻게 담고 있을까 경이롭기까지 하다. 댐 정상에서 팔각정 전망대까지
는 왕복 2키로가 넘지만 걷기에는 좋은 길이다. 이 길 곳곳은 댐 안팎의 풍경을 여과없이 볼 수 있다.
걸으면서 댐 주변과 풍경을 천천히 관찰할 수 있고 팔각정으로 올라가는 초입엔 소양댐 건설중에 목
숨을 잃은 서른일곱 명의 순직자 위령비도 만날 수 있다. 위령비를 뒤로 하고 팔각정에 올라가 소양댐
풍경을 찬찬히 스캔하였다. 막힘없이 탁 트인 호수는 첩첩산중에 둘러싸여 잔잔히 일렁인다. 흐린 하
늘 끝은 호수와 맞닿아 있고 비 갠 오후의 시간은 과거로 안내한다. 십여 년 전, 여름 장마가 한창일 때
여객선은 청평사 입구에 한무리의 여행객을 내려놓고 유유히 사라져 버렸다. 그때도 지금처럼 비개인
오후라 청평사 계곡물은 폭포처럼 쏟아졌다. 거침없이 쏟아지는 물결은 소양호로 빠르게 달려갔고 비
갠 풍경은 수채화가 청평사 계곡으로 이사온 것 같았다.
그러고 보니 소양호를 찾을 때마다 비를 동반한 것 같다. 기억조차 희미한 어느해
늦가을. 그때도 겨울을 재촉하는 가을비가 소리 없이 내리고 있었다. 기억을 거슬러
보면 소양호에서 배를 타고 양구로 향한 여행길이었다. 도시의 시간은 가을의 중간에
서 서성이고 있었지만 소양호의 계절은 겨울로 빠르게 달리고 있었다. 강원 내륙의 가
을은 스산했고 소양호는 쓸쓸했다. 양구 선착장에서 내릴 때는 이미 밤이 깊어 있었
다. 도시와 다르게 양구 읍내엔 몇몇 가게에서 불빛이 새어 나오고 찬바람만이 거리를
종종거렸다. 그때의 가을은 영화 만추와 닮았다. 영화에서 가을은 두 남녀의 거부 할
수 없는 현실과 빈 마음을 대변하고 있다. 서로의 이름도 몰랐던 훈의 눈빛이 진지해
지고 표정 없던 애나의 얼굴에 희미한 미소가 떠오를 때쯤, 누군가 훈을 찾아오고 애
나도 돌아가야 할 시간도 다가온다. 소양호도 애나처럼 쓸쓸하고 고독했다. 비갠 오
후, 초록으로 만개한 소양호는 그때의 늦가을 풍경처럼 스산해보였다.
팔각정을 내려와 물문화관으로 발길을 이어갔다. 물문화관은 휴게실과 전시실로
구성되어 있다. 문화관엔 '그리운 우체통'이 그리운 마음을 실어 나른다. 전망대 지하
1층 야외 데크에서는 소양강 처녀와 함께 사진을 찍을 수 있어 더 좋다. 소녀가 앉아
있는 벤치에 나란이 포즈를 취해본다. 박제된 처녀의 나이는 열여덟. 나도 그 시절이
있었다. 그 시절이 얼마나 눈부시고 풋풋한 아름다움인지 잘 몰랐다. 세월이 흐르니
열여덟 시절의 싱그러움은 푸른 숲처럼 숙성되어 간다. 언제쯤 유람선을 이용해서 청
평사에서의 추억을 찾을 수 있을까. 그날을 기다리며 뱃길 대신 육로가 가는 청평사
를 다시 찾아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