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래를 꿈꾸며

미주야 마음껏 걸어보자

김봉애(송미주의 할머니)

 

송미주 학생과 김봉애 할머니의 웃는 모습

 

“쟤는 왜 저런다냐?”배를 쭉쭉 밀고 기어다니는 미주를 보며 하는 말이다.
세 쌍둥이 중 막내인 미주는 진주, 선주가 걸음마를 할 때 까지 서지도 앉지도 못하고 기어다녔다. 첫돌이 되었을 때 아들은 “늦는 애도 있어요” 하는 소아과 선생님 말씀만 믿고 있을 수 없다며 검사를 받고 뇌병변 장애라는 판정을 받았다.
꾸준히 치료를 하면 성인이 되었을 때 생활에 불편하지 않을 만큼은 치료가 된다는데 대부분 보호자들이 지쳐서 포기하는 경우가 많다는 말을 의사 선생님께 들었다며 참으로 암담한 표정으로 내일부터 재활치료 병원에 다니겠다고 했다.
다음날부터 며느리는 미주를 데리고 병원에 가고 난 진주, 선주와 한 살 위의 오빠 병주를 데리고 집안일을 했다. 일년여 그렇게 다녀도 미주는 별 진전이 없었는데 어느 날 며느리가 집을 나갔다. 소를 사겠다고 모아놓았던 돈과 아들과 나의 통장 잔고가 하나 없는 것을 보고야 며느리의 가출을 깨달은 우리는 정말 하늘이 무너진다는 표현밖에 할 말이 없었다.
아들과 난 부엌방에서 날이 새도록 앉아서 결론 없는 말들을 했다. 왜 갔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이유를 모르겠고 앞으로 어떻게 살겠냐고 아들은 죽고 싶단 말만 했다. 참담해 하는 아들 앞에서 엄마는 초연해야 했다. 같이 좌절할 수는 없었다. 마냥 아무렇지도 않은 듯 애들을 넷이나 놔두고 어찌갔을까 놀랍기도 하지만 며느리 도망간 집이 우리 집만 있는 것도 아니고, 나도 며느리랑 살아온 5년이 얼마나 행복했으면 산골 초가삼간이 지상낙원인 듯 행복하게 살았으니 신선놀음하다 꿈에서 깨어난 느낌이고 사랑하는 애인에게 실연당한 기분이지만 살아야지 어쩌겠는가. 죽는 건 바쁘지 않아 죽을 용기 있음 살아봐야지.
다음날부터 건강한 애들은 어린이집에 보내고 미주를 업고 병원에 다녔다. 문제는 산속에 있는 우리 돼지 농장이 정리가 빨리 안돼 미주병원 치료가 끝나면 어린이집에 보내려고 했지만 특수교사가 없다는 이유로 받아주지 않아서 병원에 다녀오면 미주를 유모차에 태워 산길 비포장 험한 길을 걸어가 돼지 밥을 주고 오는데 돌아보면 그때가 제일 힘들었던 것 같다.
부랴부랴 어린이집 하원 시간에 맞춰서 내려오면 4명의 아이들을 씻기고 먹이고 나면 물리치료 선생님 흉내를 내가며 애들을 운동시키고, 내가 더 늙기 전에 미주를 꼭 세워야겠다는 생각에 마음이 급해져서 병주, 진주, 선주와 함께 “이렇게 하는거야” 하면서 배를 들고 무릎과 손을 짚고 기어다녔다. 다른 애들 보다 말문이 빨리 트인 미주는 말을 잘 알아듣고 오빠보다 말을 더 잘했다. 며칠 반복해서 그렇게 했더니 미주도 배를 들고 무릎으로 기어 다니다가 그대로 앉을 수 있게 되었다.

해가 바뀌고 미주는 4살이 되었다. 어떻게 알았는지 순천시 장애인 복지관에서 도우미 선생님을 보내 주셨다. 선생님은 일주일에 두 번씩 하루에 두 시간을 도와주신다고 한다. 나는 병원에 다니는 것을 부탁했고 어느 날 선생님은 왜 미주를 어린이집에 안 보내느냐고 물었다. 안 받아주더라는 얘기를 하니 요즘은 통합교육 하는데 따져서 보내라고 했지만 기꺼이 받아 준 것도 아니고 억지로 따져서 보내서 우리 미주 구박 받을까 싶어서 안 보내겠다고 했다. 친할머니도 미주 보는게 이렇게 힘든데 피한방울 안 섞인 선생님을 어떻게 믿냐고요. 선생님이 말을 하셨던지 며칠뒤 어린이집 원장으로부터 미주를 받아주겠다고 연락이 왔고 사랑으로 잘 보살피겠다는 약속을 받고서야 미주도 어린이집에 다니게 되었다. 그해 여름 나는 마을회관 정자에서 삶은 감자양푼을 가운데 두고 동네 할머니들과 수다에 빠져있고, 미주는 내 옆에 앉아서 감자를 먹으며 도시에서 온 아이들과 우리 아이들이 소리를 지르며 뛰어다니며 노는 것을 쳐다보고 있었다.

 

송미주 학생이 책상 앞에서 웃는 모습
송미주 학생이 책상 앞에서 웃는 모습

 

“어머! 미주 섰다. 미주 섰어!” “봐! 설 수 있다 했잖어, 걸을 꺼라 했잖아!”
한 할머니가 소리쳤다.
돌아보니 미주가 정자 기둥을 잡고 서서 웃고 있었다.
할머니들은 박수 치고 미주는 웃고 나는 울었다.
미주는 그 후로 내가 시키지 않아도 혼자서 서는 연습을 열심히 했다.
그런데 꼭 뭔가를 잡고 섰다. 의사 선생님이 뇌병변 장애는 본능으로 움직이지 못하고 서고 걷는 것을 학습해야 한다고 해서 앉았다 서는 모습을 많이 보여주었다. 내가 힘들 땐 진주, 선주도 무던히도 앉았다 서는 모습을 미주에게 보여주게 하였다.
겨울 어느 날 미주가 아무것도 잡지 않고 우뚝 서서 “봐봐”하며 소리쳤다.
우리 애들은 박수를 치고 기뻐했고 나는 미주를 안고 “우리 미주 장하다. 그렇게 열심히 하더니 되었네. 우리 미주 장하다.”하며 정말 기뻤다. 희망이 보였고 보람이 있었다.
버스 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리고 있는데 미주 아빠가 차타고 가다가 내려서 잠바를 벗어서 등에 있는 미주를 덮어주고 가는데 어떤 할머니가 “왜 다 큰 애를 업고 있소?” 근데 참 할말이 없어서. “다리가 아프요”. “얼굴도 예쁜 것이…” 에고 쯔쯧 혀를 찬다. 그 소리가 왜 그리 듣기 싫었는지 모른다. 산골 어느 마을에서 우리 마을에 오는 버스를 30분 기다려야 한다. 담요랑 지아빠 잠바를 뒤집어 씌어놔도 벌벌 떠는 게 등으로 느껴진다. 여름에는 미주 배하고 내 등하고 땀띠 범벅이고, 다섯 살이 되니 내 몸에도 이상이 왔다. 무릎엔 관절염 허리는 디스크 어깨뼈도 나빠져서 온몸이 부었다.
미주가 재활치료 하는 동안에 물리 치료를 받으면서 여기까진가? 포기해야 하나? 아직 걷지도 못하는데… 내가 여기서 포기하면 내몸은 좋아지겠지만 미주는 영영 걷지도 못하고 장애인으로 이 험한 세상을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나는 최선을 다 한 건가 훗날 후회되지 않겠는가… 온갖 회한과 갈등에 괴로웠다. 그래서 나는 운전을 배웠다. 무서웠지만 미주를 생각하며 열심히 배워 면허를 따고 농장을 정리한 돈으로 자동차를 샀다. 미주는 설 수 있으니 누가 시키지 않아도 걸어 보려고 애를 썼다. 그리고 기어다니지 않고 벽을 잡고 걸어다녔다. 한 발을 들었다가 뒤로 뻥 넘어져서 뒤통수에 계란만한 혹이 나곤 했다. 그러면 소리 내어 울지도 않고 눈물을 흘리면서 다시 일어서기를 반복했다. 보는 내가 질릴 정도로 했다. 나는 너무나 안쓰러워서 방바닥 거실바닥 부엌바닥에 매트를 깔았다.
여섯 살이 되었고 드디어 우리 미주가 네 걸음을 걸었다. 마지막 걸음에서 균형을 못잡고 넘어지긴 했지만 난 인제 미주 치료가 끝난 줄 알았다. 이제 정상으로 걸을 수 있게 된 줄 알고 “미주야 네가 해냈어. 이건 인간승리야.” 그러면서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다. 그런데 그뿐이었다. 더 이상 진전이 없이 세월이 흘러갔다. 주차장에 차를 주차해 놓고 치료실까지 업고 가면 온몸이 땀으로 범벅이 되고, 절룩거리나마 애기 손잡고 치료실에 들어서는 엄마가 얼마나 부러웠는지 모른다. 어느 젊은 엄마가 미주 할머니 보면 힘들단 말도 못하겠다하고 치료사도 할머니가 조금 다니다 말겠지 했는데 지금껏 다닌다고 대단하다고들 했지만 사실은 나도 실망스럽고 지쳐가고 있었다. 하지만 여기까지 와서 포기할 순 없다. 자신을 채찍질 하며 부산에 이런 애들 잘 보는 병원이 있다는 말을 듣고 가서 엑스레이를 찍어보니 틀어졌던 골반은 정상이 되어 있었지만 발의 뼈가 변형이 되고 있다 해서 보톡스 주사를 맞고 치료받던 병원에 낮병동 입원을 해서 집중치료를 시작했다.
아침에 아이들을 어린이집에 보내면서 엄마 없는 티 안나게 하려고 애써 꾸며보내고 미주 데리고 병원에 가서 하루 좋일 간병하고 저녁때 집에 와서 아이들 돌보며 집안일 하고. 정신력이지 어떻게 해냈나 싶다. 그래도 애쓴 보람으로 열걸음을 걷게 되었고 병원에서는 이제는 재활병원에서 더 이상 할 일이 없다 한다. 이제 그만 오라는 것을 만족이 안돼서 자꾸 병원을 갔다. 미주보다 더 심한 친구를 봐줘야 하니 그만오라는 말을 또 듣고서야 병원을 그만 두고 입학을 1년 앞두고 정말 열심히 운동을 시켰다. 어린이집을 졸업할 때 나는 남들이 나보고 대단하다고 하지만 어린이집 선생님들이 엄마처럼 애들을 보살펴 주었기에 이만큼 살아올 수 있었다고 생각하여 감사의 편지를 보냈다.

초등학교 입학하기 전 1년 동안 비나 눈이 오지 않는 날은 2킬로미터 정도 되는 길을 혼자 걷게 했고 버스 타고 내리는 연습을 날마다 시켰다. 미주는 남이 볼 땐 금방 넘어질 것 같은 걸음걸이로 안 넘어지고 걸어간다. 온전히 미주 혼자 힘으로 서서 초등학교 입학식을 할 때 친구들과 함께 줄을 서서 자꾸만 나를 쳐다봤다. 나는 눈물이 나올 것 같아서 강당 천장을 쳐다보았다. 순천 선혜학교에서 미주를 입학시키라고 문서도 오고 전화도 왔지만 난 걱정을 하면서도 낙안초등학교에 미주를 보냈다. 보내고 나니 정말 잘했다는 마음이 든다.
낙안 초등학교는 정말 애정이 넘치는 학교다. 언제나 다정다감하고 사람 반갑게 맞아주고 특히 도움반 선생님들께 진심으로 감사하다. 작년 겨울방학 때 미주 왼쪽 다리를 수술하고 완치가 되지 않은 상태에서 학교에 보냈을 때 등하교 시간에 마중 나와 주시고 운동회 때 미주를 업고 뛰어 주시는 선생님께 눈물 나도록 고마웠다. 가족 외에 누가 그렇게 애정을 가지고 대해 줄 것인가 참 스승이라 느꼈다. “선생님을 처음 만났던 그날부터 오늘까지 변함없이 마음을 다 주시는 방그레 선생님 감사하고 고맙고 사랑합니다.”

송미주학생과 김봉애 할머니, 우이구 원장, 교장선생님, 담임선생님, 그리고 친구들과 함께 전국 장애이해 사진전 학부모부문 대상을 수상하며 환하게 웃고 있다.

 

 

 

스토리+

미주야 마음껏 걸어보자

90시간의 결실

연수의 꽃! 감동과 환희, 소중한 인연들과 함께한 자격연수


현장특수교육 가을호 제23권

  • 01 프롤로그
  • 02 오픈칼럼
  • 03 모두가 행복한 수업
  • 04 현장투어
  • 05 화제의 특수교사
  • 06 톡톡Talk
  • 07 스페셜테마
  • 08 차 한잔을 마시며
  • 09 월드리포트
  • 10 특수교육 동정
  • 11 여가+
  • 12 미래를 꿈꾸며
  • 13 스토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