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함께 여기 - 청출어람(靑出於藍)이 보람인 시각장애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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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특수교육
2023
제30권 4호
(vol. 130)
우리 함께 여기

청출어람(靑出於藍)이
보람인 시각장애교육

이영미(서울맹학교 교감)
오늘날 교권이 무너지고, 특수교사뿐 아니라 많은 교사들이 자긍심을 박탈당하고 있는 교육 현장이지만, ‘교육은 사람을 변화시키는 능력이며, 감동만이 사람을 사람답게 한다.’는 믿음으로 특수교육 현장에 몸담은 지 39년! 그중 31년을 시각장애학생들과 함께 할 수 있었던 건 행운이고 보람이다. 스승의 삶은 언제나 청출어람(靑出於藍, 「푸른색이 쪽빛에서 나왔으나 쪽빛보다 더 푸르다.」는 뜻으로, 제자가 스승보다 나은 것을 비유하는 말)을 보람으로 사는 것이 기쁨인데, 나의 교직 생활은 제자들의 청출어람을 매일 느끼며 지냈으니 이 얼마나 기쁜 일이 아니겠는가. 스승을 알아주는 제자가 있는 특수학교는 ‘시각장애 특수학교’라고 농담으로 말하지만, 시각장애 교육 현장에서 배우고, 가르치며, 봉사하는 것이 교직의 즐거움이라는 걸 알 수 있게 하는 학교가 ‘시각장애 특수학교’라고 감히 말하고 싶다.
이런 행운의 시각장애교육을 하게 된 계기는 대학교 1학년 때, 동아리 선배의 부탁으로 ‘시각장애학생 동아리’를 도와주면서다. 그 당시 시각장애대학생은 대학교 입학도 어려웠지만, 장애학생에 대한 특별지원이 없는 대학생활은 더 큰 어려움이었다. 교재를 녹음하거나 점역해 주는 기관도 제대로 없고, 지원 또한 없어서 모든 교재는 각자 알아서 녹음이나 점역을 해야 했다. 오늘날과 같이 과제의 대필이나, 시험 시간을 1.5배나 1.7배로 주는 편의 제공도 없었다. 그래서 같은 과 시각장애학생의 교재를 녹음하거나 영문 교재는 퍼킨스 점자 타자기로 점역했다. 묵자타자기를 사용하여 과제를 도와주고, 시험 때는 대독, 대필하는 봉사를 했다. 이러한 계기로 장애영역 선택을 할 때 ‘시각장애교육’을 선택하게 되었고, 석사, 박사과정도 ‘시각장애교육’만 하게 되면서, 마치 운명인 듯 31년을 서울맹학교에서 시각장애 학생들과 함께 하게 되었다.

1995년 / 2023년 현재


임용고시를 거쳐 4년 동안은 특수학급에서 한 학급에 15명의 지적장애학생과 함께 하다가, 1989년, 개교기념일이었던 4월 1일에 서울맹학교 교문을 들어섰다. 이때 나를 맞이해 준 흰 기둥에 상록침엽을 얹은 ‘백송’은 귀한 나무인 만큼 나를 압도했다. 그 ‘백송’ 앞에서 ‘시각장애학생들이 백송처럼 낙락장송이 될 수 있도록 밑거름이 되어야겠다.’고 다짐한 것이 엊그제 같은데, 백 년을 넘게 그 자리를 지켰다던 백송도 자신이 뿌린 젊은 백송에게 자리를 내놓고 둥치만 남아있다.
교사 시절 제자들이 스승의 능력을 뛰어넘어 실력뿐 아니라 모든 면에서 사회의 귀감이 되기를 바라고, 그럴 가능성이 보여, 학급 급훈을 ‘청출어람’으로 한 적이 있다. 현재 청출어람한 제자들이 교육계를 비롯하여 행정부, 입법부, 사법부, 각 국가 기관이나 단체 등 사회 각계각층에서 멋지게 활동하고 있으며, 시각장애학생들이 학업수행에 어려움이 없도록 법적,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고, 보조공학기기나 프로그램을 개발하여 시각장애대학생들이 동료학생들에게 어려운 부탁을 하지 않아도 되도록 한 것도 제자들의 노력으로 얻어낸 결과라 할 수 있다. 일일이 훌륭한 제자를 다 말할 수 없지만, 가르친 보람을 느끼며 감동케 하는 몇몇 제자들이 있다. 시각장애 관련 기관장으로 사회 전반에 걸쳐 유익한 일을 하고자 사업을 확장하면서, 모교와 나의 사소한 어려움까지도 챙겨주며 도움을 주고 있는 제자, 같은 동료교사로 있으면서 늘 마음을 나누며 도움을 주는 제자에게는 감사의 마음이 앞선다.
“교감샘! 말복인데 삼계탕 한 그릇 하실까요?”, “갑자기 날씨가 추워졌는데 감기 조심하셔야죠”, “우리 집 베란다에 문주란 꽃이 예쁘게 피었어요.”라며 때 되면 안부를 물어주는 오빠뻘 제자, 그 제자는 중도에 실명하여 시각장애인이 되었다. 그는 본인이 힘들 때 내가 재활의 의지를 심어주고, 사회에서 당당하게 살아갈 수 있게 해 주었다며 나를 자신의 영원한 스승이라고 말한다. 스승의 날과 특별한 날을 항상 챙기는 제자는 늘 나의 자랑거리이다.

1991년 졸업 사진 (오른쪽 맨 앞 이영미)


또한, 내가 학생에게는 안마를 받지 않는다는 걸 알고, 상담을 핑계로 안마실습실로 불러, “실명의 어려움을 극복하고 안마 기술을 배우게 해 준 학교와 선생님께 감사의 마음을 대신하여 졸업하기 전 꼭 안마를 해드리고 싶다.”며, 자신이 배운 기술로 전신 안마를 해 준 제자, 병아리가 알을 깨고 나와 처음 만나는 닭을 어미로 아는 것처럼 자신이 처음 학교에 상담하러 왔을 때 입학 안내를 해 주고 입학해서도 계속 관심 가져 준 내가 “제 마음의 눈뜨게 해 준 어머니”라며 그 마음이 지워질까 10년이 지난 뒤에야 수줍게 고백하는 나이 많은 제자, 안마원을 운영하며 시각장애인의 유보 직종인 안마사의 위상을 높이고 인정받는 안마사로 활동하는 제자, 이들의 성공 소식을 들을 때마다 괜히 내 어깨에 힘이 실린다.
그리고 떳떳하게 사회구성원으로 살아갈 수 있게 해 줘서 감사하다며, 남몰래 조용히 장학금을 기부한 제자도 있었다. 후배 사랑으로 이어지는 제자의 따뜻하고 겸손한 마음은 삶의 방향을 선한 길로 잡게 한다. 그뿐만 아니라 자립생활 전공과를 졸업한 시각중복장애 제자가 취업했다며 명함을 건네거나, 졸업하고 못 만난 지 오래되었는데도 길에서 목소리를 듣고, 팔을 잡으며 반가움을 표현하는 제자를 만났을 때는 이루 말할 수 없는 감동이 있다. 꼭 언어적 표현이 아니더라도 얼마든지 교감을 할 수 있다.
가르치는 사람은 제자가 단 두어 명뿐이라도, 인사(人師)의 길을 결코 헛되이 걷지 않았다고 하는데, 제자의 스승 사랑에 날마다 감동이고 기쁨이니 교직 생활에 이보다 더한 복이 어디 있겠는가?
후배 교사들이 사람다운 사람의 따스한 향기가 가득한 특수교육의 현장에서, 보람을 느끼기를 기원한다. 나는 비록 학교라는 무대는 떠나지만 새롭게 전개될 무대에서, 장무상망(長毋相忘, '오래도록 서로 잊지 말자')하며 오래도록 제자와 사랑을 나누고 싶고, 마음의 향기 가득 담아 그동안 쌓아온 경륜으로 시각장애교육이 환한 웃음꽃을 피우는데 작은 씨앗이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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